사건의 시작
1980년 1월 23일 새벽 5시 20분, 강원도 고성군 거진 앞바다의 동해. 속초 해양경찰서 소속의 60톤급 소형 경비정 '72정'이 수심 105미터의 바다로 침몰했습니다. 이 작은 배 위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야간 경비에 나선 17명의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해양 경찰 9명과 의무 전투경찰 8명. 이들은 모두 동해의 어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직무라고 생각하며 그 밤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 발생합니다.
침몰의 원인, 그리고 의문
사고의 경위
72정이 침몰하게 된 것은 200톤급의 더 큰 경비정인 '207함'과의 충돌입니다. 기상이 좋지 않았고 항해 장비에 고장이 발생했습니다. 항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두 경비정이 서로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72정은 바다로 가라앉았습니다. 17명이 모두 실종되었습니다.
사고 직후 해경과 해군, 수산청 지도선, 어선 등 200여 척이 사고 해역 반경 80킬로미터를 필사적으로 수색했습니다. 하지만 구명뗏목 같은 유실물들만 건져올 수 있었습니다. 17명의 승조원들은 찾지 못했습니다.
1980년이라는 시대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980년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신군부 시절이었습니다. 국가 주요 뉴스는 검열 대상이었고, 군인과 경찰의 명예에 관한 사건은 더욱 그래야 했습니다.
사건 당시 유족들은 해경의 설명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정확히 무엇이 일어났는지, 왜 구조할 수 없는지 알려받지 못했습니다. 당신들의 아들, 남편, 형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듣지 못한 채, 유족들은 시신도 없이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것이 1980년의 국가 권력이 요구한 침묵이었습니다.
39년의 침묵 속에서
세상에 잊혀진 17명
72정의 침몰 사고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국민들이 알지 못했고,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으며, 뉴스에서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17명의 청년들이 바다 속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유족들은 기억했습니다. 매일 밤 그들은 그 사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가슴에 묻고만 살아야 했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도 갖지 못했습니다. 딸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죽은 자신들의 가족이 역사 속에서 지워지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속초시 장사동 해경 충혼탑에는 1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시신은 없습니다. 유해도 없습니다. 가족들이 묻어줄 유품도 없습니다. 오직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39년 만의 발견
2019년 4월, 선체 발견
39년이 지난 2019년 4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해경이 함께 진행한 탐색 작업에서 수심 105미터의 바다 속에서 72정으로 추정되는 선체를 발견한 것입니다.
사이드스캔 소나라는 반사파를 이용한 해양물리탐사 장비로 바다 속을 조사하던 중, 원래 침몰지점으로 알려진 곳에서 북쪽으로 643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그 선체를 찾아냈습니다. 선체의 함미에 있는 포 거치대, 하부가림막, 엔진케이싱 등이 72정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유족들은 기뻐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가족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39년 만에 자신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충원에 제대로 모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인양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20년, 다시 한 번의 충격이 유족들을 덮쳤습니다.
해경이 72정 인양을 위해 예산 205억 원을 국회에 신청했을 때,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이를 인정하고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와 본회의 의결 과정에서 이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습니다.
이유는 "코로나19 백신 비용 증액"이었습니다.
유족협의회 대표 조병주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현충일에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유공자 예우를 강조하는 것을 보고 일이 잘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72정 순직 대원들은 민간 선박도 아니고 해상 경비 중 순직한 국가유공자인데, 왜 우리 바다 순직자는 발굴 안 하는지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해경은 현장 조사 예산 45억 원을 계속 신청했지만, 계속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45년이라는 시간의 무게
나이 들어가는 유족들
2025년 현재, 72정 침몰이 발생한 지는 45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젊었던 유족들은 이제 고령에 접어들었습니다.
조병주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습니다. "어머니도 생존해 계신 분이 한 분 계시고, 집사람이 생존해 있는 분들이 세 분이나 있습니다. 그분들이 연세가 많으십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좀 해줬으면..."
한 생명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5년이 아니라, 10년이 아니라, 45년을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하지 않은 일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그들을 찾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가요?
정부는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순직자의 유해를 발굴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바다에 있는 순직자들은 왜 놔두고 있을까요? 한 유족이 던진 질문입니다.
해경 조직도 선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72정 선배들을 찾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국민적 여론이 충분하지 않다", "예산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멈춰 있습니다. 일종의 사회적 합의 부족을 핑계로 45년이라는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꼬꼬무 200회 특집이 의미하는 것
침묵을 깨는 목소리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가 200회를 맞이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6개월에 걸쳐 수중 탐사를 진행하고 72정 침몰 사건을 특집으로 다루기로 결정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45년간 침묵해왔던 한 척의 배와 17명의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기다려온 유족들의 이야기를 다시 세상 앞에 꺼내놓겠다는 뜻입니다.
배우 이연희가 72정의 선체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저 상태로 45년 동안 구조의 손길을 기다려온 것 아니야." 이 한 마디는 이 사건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국민의 기억이 갖는 힘
전현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꼬꼬무가 200회 특집을 하지 않았으면 72정에 대해서 국민들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72정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은 유족들과 해경 내부 인물들, 그리고 이를 따라다니던 극소수의 관심층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꼬꼬무의 200회 특집을 통해 국민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국민의 관심과 기억이 모아지면, 국가도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믿음"
장항준 감독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국가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국민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72정의 17명을 찾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정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국민들에게 "당신들의 희생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입니다.
국가가 시민을 돌보지 않으면, 시민들도 국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45년 뒤에라도 자신의 순직자를 찾기 위해 행동한다면, 그것은 국민들에게 깊은 신뢰와 자부심을 줄 수 있습니다.
1980년의 침묵을 다시 묻기
왜 당시에는 침묵했는가?
이 모든 이야기의 근본에는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왜 1980년에는 이 사건을 침묵해야 했는가?
1980년은 한국 현대사에 매우 특별한 해입니다.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했던 시절입니다. 국방과 국가 안보가 최고의 우선순위였고, 군과 경찰은 그 이상의 비판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조직이었습니다.
경비정이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나고 17명이 죽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논리로는 "국가 권력의 실패"를 의미했습니다. 신군부는 이를 공개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족들도 그 침묵에 협력해야 했습니다. 국가 권력에 항의한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45년이 지났습니다
45년이 지났습니다. 신군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2정의 17명은 아직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름은 있지만 시신은 없습니다. 가족들이 모실 수 있는 유품도 없습니다.
꼬꼬무의 200회 특집 '72정은 응답하라'는 이 침묵을 깨고, 그 침묵이 만들어낸 결핍을 마주하려는 시도입니다. 1980년의 국가 권력이 강요했던 침묵이 오늘날까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봐야 하는 이유
역사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
우리가 이 특집을 봐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기 때문입니다.
72정의 17명이 잊혀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순직자들을 기억하지 않는 국민이라면, 우리 자신도 역사 속에서 그렇게 대우받을 것입니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도 진실입니다
1980년에는 침묵해야 했던 진실입니다. 하지만 2025년에는 우리가 그 진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72정이 어떻게 침몰했는지, 17명이 어디에 있는지, 왜 이렇게 오래 방치되었는지 등의 사실들은 45년의 침묵 때문에 진실의 가치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침묵의 시간만큼 더 무게 있는 진실이 되어 있습니다.
기억이 행동을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기억과 관심이 모아지면 국가도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72정 인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 5년, 10년이었다면 "기술 부족" 같은 핑계도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45년입니다. 우리나라의 해양 기술은 충분히 발전했습니다. 문제는 예산과 국민적 관심입니다.
꼬꼬무의 200회 특집을 통해 수백만 국민이 이 사건을 알게 되고 기억하게 되면, 그것이 변화의 첫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이 여론이 되고, 여론이 정치가 되고, 정치가 행동으로 바뀌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며: 2025년, 72정에 응답할 차례입니다
1980년 1월 23일 새벽 5시 20분, 17명의 청년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국가는 그들을 찾지 못했고, 국민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45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응답할 차례입니다.
2025년 11월 20일, SBS 꼬꼬무 200회 특집 '72정은 응답하라'에서 우리는 그 응답을 시작할 것입니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펼쳐서, 그 안에 있는 17명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들의 유족들의 눈물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책임입니다.
꼬꼬무 200회 특집 '72정은 응답하라'
매주 목요일 밤 10시 20분 SBS 방송
2025년 11월 20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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